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3 (인간지표)
아주 말이 많은 선배가 있었다. 모르는 게 없는 선배라고나 할까, 반짝이는 눈으로 시장이며 지표며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그런데 나는 배은망덕하게도 대화가 불편했다. 다 뻔한 얘기기도 하거니와, 말을 거는 타이밍도 안 좋았고 말을 끝낼 줄도 모르셔서 퇴근길에 만나면 한자리에서 한두 시간씩도 얘기가 이어지곤 했다. 그것만으로는 후배에게 이 넓은 트레이딩의 세계를 이해시키시려는 그분의 호의를 싹퉁머리 없이 무시한 게 될 테지만, 조금 더 비겁하게 얘기하자면 그분은 돈을 잘 못 버시는 분이었다. 컴비네이션으로 돈도 못 버는 선배가 끝도 없이 훈계인지 변명인지 모를 얘기를 늘어놓으니 듣기가 벅찼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
이번 얘기는 패자에 대한 이야기다. 투기가 오가는 이 바닥에 흥미로운 인간군상이 정말 많지만, 그중에 가장 이야기하면 입에 쓴 맛이 남는 방 안의 코끼리는 바로 ‘루저’다. 루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저것이 나의 모습인지, 혹은 내일의 나의 모습이 되진 않을지, 저 사람을 사랑해야 할지, 지독하게 미워해야 할지 정신이 아늑하다.
워런 버핏은 ‘카드를 칠 때 호구가 눈에 띄지 않으면, 내가 그 호구인 것이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우리 선량한 한국 사람들은 팀 내에 호구나 패자를 인지하거나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남 일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좁은 사회에서 애써 사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실패하는 모습을 진정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매에 있어서는 소위 ‘인간지표’가 낭중지추처럼 바지를 뚫고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점잖은 선배들이 후배를 위하는 마음에 비기를 알려줄 듯 머뭇거리다 속삭여줬다. ‘매매를 잘하고 싶거든 네 옆에 제일 못하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해봐….’ 반면교사의 개념을 넘어 이들 인간지표들은 항상 가장 잘못된 순간에 가장 잘못된 예언을 한다. 예컨대 코스피가 5일째 올라가고 있을 때 평소에 주눅이 들어있던 최하위 트레이더가 목소리에 갑자기 힘을 싣고 ‘봤지? 내가 장 오를 거라 그랬지? 봤지? 이제부터 상승장이야~’ 라고 외치기 시작하면 뒷머리가 쭈뼛이 서며 묘한 영감 같은 게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일부 팀원을 무시하거나 희롱하는 심리 때문이 아니다. 이런 인간지표는 트레이딩 룸이라면 어디에든 있다. 이들은 8~90%의 확률로 장을 정확히 반대로 본다. 무서울 정도다. 이들이 내뱉은 모든 이야기를 다 합치면 솔직히 50:50에 가깝겠지만, 특정한 때에 아주 정교한 반대 예언을 뚜렷한 방식으로 내뱉는다. 이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는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이러한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고수익 트레이더의 존재만큼이나 시장이 무작위 하지 않다는 살아있는 증거라는 점을 우선 곱씹어보자.
심하게 얘기하면 투자자가 셋만 모여도 한 명은 인간지표일 수 있다. 애널리스트들의 보고서를 (평균 내서) 반대로만 매매해도 돈이 벌린다 하니 그들도 인간지표요, 주간지 표지만 보고 (평균 내서) 반대로 매매해도 돈이 벌린다 하니 기자들도 인간지표요, 기관매매도 트레이더들에게는 인간지표다. 우리의 동료도 인간지표 취급하는 판에 남들에게 점잖을 떨 이유는 없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개인 매매의 방향을 사람들이 인간지표로 흔히 쓰지 않던가. 그런 씁쓸한 이야기다. 이런 인간지표들은 수십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해왔다.
수십 년 전에 전자거래가 활성화되기 전에는 트레이딩 플로어 (trading floor)라는 곳이 있었다. 증권사 직원들이 거래소에 모여 서로를 마주 보며 주문을 체결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에는 증권사 직원 외에도 전문 트레이더들이 득실거렸고 지금도 득실거린다. 그 시끄러운 장터가 싫어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예로부터 장터에서 인간지표를 발견하기 가장 쉬운 법이다. 당시의 트레이더들은 시장의 움직임 자체보다도 항상 과장과 허영을 섞어 뻘짓을 하는 인간지표들을 솎아내어 항시 그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하여 그 반대 방향으로 매매 했다고 한다. 포커판과 똑같다. 불안한 자의 허황 성세는 숙달된 선수에게 다른 어떤 정황보다 정확하게 포착된다. 모두에게 허용되지는 않는 재능이 바로 블러핑이기 때문이다.
주니어들은 대개 인간지표들이다. 기가 막히게 반대로 매매한다. 미국의 어떤 헤지펀드는 주니어들을 뽑아놓고 매매를 시켰는데, 주니어들이 아무리 손실이 늘어나도 온화한 미소로 용서해줬다고 한다. 전설적인 트레이더 한 명이 주니어 시절 여기서 일했는데, 점점 수익이 개선되어 결국엔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임원진이 그를 부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자네들의 매매를 정확히 반대로 체결해서 회사가 크게 수익을 내고 있었네. 근래에 자네의 포지션도 그렇게 매매를 했는데 이걸 어쩌나. 손실이 커져서 회사를 문 닫게 되었어.” 졸지에 돈도 못 받고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다. 이 경우는 실패했지만, 이런 전략이 트레이딩 룸에서는 정말 흔한 얘기다. 시장을 작두 타듯 반대로 매매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의 주니어며, 대다수의 일반인이기도 하다.
이유는 시장의 움직임 자체가 이런 주니어며 일반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어 쫄아 있다가, 불현듯 알 수 없는 용기가 솟구치는 순간을 비단 그 사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루저들이 정확히 똑같은 주파수 상에서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장 움직임에서 수익을 내지 못해 불안한 사람, 손실이 쌓여 불안한 사람, 소중한 돈을 날려 불안한 사람, 괜한 욕심이 치솟는 사람, 모두가 무의식중에 더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뚜렷하게 방향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장 패턴이 있다. 이럴 때 그들은 자신 있게 예언을 외친다. 틀릴 가능성이 가장 작아 보이므로 명예 회복을 하고 싶은 심리 일터. 이럴 때 시장만 바라보며 살얼음 위를 걷던 트레이더들이야 말로 예언을 듣는 느낌이다. 인간지표의 목소리 속에 용기로 가장된 허영과 불안감을 느껴버리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숙련된 트레이더들이 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팔아치우게 되어 있다.
모든 투자자들이 그렇지만, 트레이더들도 입버릇처럼 ‘이 방에 도청장치가 있어 내가 사기만 하면 빠져’라고 되뇐다. 팀원들의 긴장을 녹여주려고 CCTV를 찾는 흉내를 내기도 한다. 절친했던 형님은 시장(이라 쓰고 무의식이라 읽는다)을 속이기 위해 눈꼽만큼 사고 동시에 다른 계좌로 왕창 팔아버리기도 했다. 그 형님은 도청장치 들으라고 어마어마하게 엄살을 부리곤 했는데 “야!! 야!! 왜 이렇게 빠져 도대체 왜 이렇게 빠졋!!” 고함을 치길래 포지션을 보니 몽땅 하방 포지션이었다. 인간지표가 아니건만 행여 인간지표화 되고 싶지도 않은 처절한 블러핑이 또 블러핑을 불러서 나중엔 듣는 내가 다 헷갈리고 안쓰러웠다. 대부분 돈 버는 사람들은 남들이 위기일 때 버는 법이다. 입으론 ‘X 같네 왜 이렇게 움직여대냐’라고 쌍욕을 하며 매매를 하지만 뜯어 보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함이지 포지션은 시장에 순응해 있거나 선도해 있었다.
흔히 트레이더들끼리 ‘매매에 재능이 없는 건 죄가 아니야,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좋은 선택이야.’ 라고 위로를 한다. 실패하는 사람이 너무나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에, 붙잡고 있는 사람이 처절해 보인다. 트레이딩의 꿈, 일확천금의 꿈만이 삶의 정도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도, 언젠간 나도 심리가 꼬여서 인간지표로 추락하는 것 아닐까 하는 깊은 근심을 안고 산다. 배가본드라는 만화에서 큰 상처를 입은 자객 츠지카제 고헤이가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이 죽고 죽이는 나선에서 나는 내려간다’, 라며 평안한 표정을 하는 고헤이 앞에 무사시는 혼란에 빠진다. 트레이더들의 삶이 그러했다.
출처 : 두물머리 천영록 대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uliusc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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